피란민과 부산의 산동네

한국전쟁의 유산, 부산의 산동네에 대한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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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산복도로 모습(영선동 일대)임시수도기념관

부산은 오늘날 도심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산동네와 이 산동네들 사이를 가로지르는 산복도로가 자아낸 독특한 경관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이 중 일부는 바다와 항구를 조망할 수 있는 아름다운 경관으로 연중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유명 관광지이기도 합니다.  부산만의 경관이 한국전쟁이라는 고난의 시기에 형성된 것을 알고 계시나요? 

메러디스 빅토리 호에 승선 대기 중인 피란민들임시수도기념관

한국 전쟁과 부산 산동네

한국이 1945년 광복을 맞이한 시점에 부산의 인구는 대략 30만 명이었습니다. 광복 후에 10만 명 이상의 귀환 동포가 부산항으로 들어와 부산에 정착하면서 부산의 인구는 크게 증가하였습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뒤에는 마지막 교두보가 된 부산으로 피란민들이 전국에서 모여들게 됩니다. 그 결과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에 부산의 인구는 84만 명에 육박하게 됩니다. 

피란민의 생활 모습(전포동)임시수도기념관

한국전쟁 직전에 부산의 주거 공간, 상하수도 등의 사회기반시설은 일제강점기 부산의 인구 30만 명을 기준으로 하여 운용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한국전쟁 직후에 부산은 몇십 만 명에 달하는 피란민들을 모두 수용할 수 없었습니다.

부전천변 피란민 판자촌 전경임시수도기념관

부산시에서 이들 피란민들을 수용하기 위해 극장, 공장, 여관, 심지어 일반주택 등까지도 피란민 수용시설로 활용하였지만, 피란민들을 위한 주거지는 절대적으로 부족하였습니다. 또한 집세가 크게 상승하여 가재 도구만 급히 챙겨 피란을 온 사람들은 방 한 칸 구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많은 피란민들이 산으로 향해 나무를 베고 산비탈의 경사면을 대강 다듬은 뒤 판자나 거적때기 등을 사용해 판잣집을 지어 살기 시작하게 됩니다.

부두에서 드럼통을 옮기는 부두 노동자임시수도기념관

당시 대한민국 물류의 중심지는 외국으로부터 많은 원조물자 및 군사물자가 들어온 중앙동의 부두와 부산역 일대였습니다. 미군 등 외국 군대가 처음 당도하는 곳도 이 지역이었고, 이러한 물자와 인력은 부두와 바로 인접해 있는 부산역을 통해 전국으로 보내어 졌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부두와 부산역 주변에서 하역노동자나 지게꾼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국제시장 전경임시수도기념관

부두와 부산역 일대 이외에도 생필품과 사치품은 물론이고 미군 부대에서 나온 각종의 물품 그리고 밀수품에 이르기까지 온갖 종류의 물품이 거래되었던 국제시장 또한 피란민들의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피란민들은 목돈이 없었기 때문에 시장에서 상점보다는 주로 노점을 운영하거나 행상을 하였으며, 지게로 짐을 나르는 지겟일도 많이 하였습니다. 

부산 산복도로 전경임시수도기념관

그래서 판잣집은 영주동, 초량동, 수정동, 영도 등 부두와 부산역 주변 지역, 그리고 용두산, 대청동, 아미동, 대신동, 보수동 등 국제시장 주변 지역의 산비탈에 집중적으로 들어섰습니다. 이 지역들 외에도 범일동, 감천동, 연산동 등 비교적 도심과 떨어진 지역의 고지대에도 판잣집들이 지속적으로 지어졌습니다. 부산의 거의 모든 산비탈은 이렇게 사람들이 모여 사는 주거공간이 되었습니다. 

부산 산동네와 산복도로임시수도기념관

한국전쟁 이후 산동네

한국전쟁 직후부터 각종 산업 및 수산 분야의 발전이 크게 이루어지면서 부산의 인구는 줄지 않고 오히려 크게 증가하였습니다.  1960-70년대까지 부산으로의 인구 유입이 지속되면서 산동네는 부산 전역으로 확장되었습니다. 

부산 산복도로 전경임시수도기념관

산동네들을 연결하는 산복도로는 1964년에 동구 초량동에서 처음으로 개통되었습니다. 이후 2012년 12월 말 기준 부산의 산복도로는 진구, 동구, 중구, 서구, 사하구, 사상구에 걸쳐 있으며 그 거리는 총 22,229m에 이르게 됩니다. 

감천문화마을(현재 모습)임시수도기념관

감천문화마을

부산의 대표적인 산동네인 감천문화마을은 산비탈 가득히 매우 질서정연하게 배열된 계단식 주택들로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고 있습니다.  한국전쟁 때 몰려든 피란민들이 모여 살기 시작해 형성된 이 마을은 오늘날 한국의 ‘마추픽추’,  ‘산토리니’로 불리며 부산의 대표적 관광명소로 널리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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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동 비석문화마을(현재 모습)임시수도기념관

아미동 산동네, '비석문화마을'

아미동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을 위한 화장장과 공동묘지가 집중적으로 위치한 동네였습니다. 한국전쟁으로 부산으로 온 피란민들 중 일부가 이곳에 임시 천막 등을 설치하고 살기 시작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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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이 끝난 이후에는 도심 속 판잣집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대거 이주해 온 곳입니다. 지금도 이 마을의 골목 및 집 주변 곳곳에서는 비석과 상석 등 옛 일본인 공동묘지의 흔적이 발견됩니다. 

우암동 전경(현재 모습)임시수도기념관

우암동 '소막마을'

우암동은 부산의 남동쪽에 위치한 바닷가 마을입니다. 1909년에 조선에서 일본으로 수출하는 소에 대한 전염병 검역이 제도적으로 실시되면서 우암동은 전국 최대 규모의 검역소인 ‘부산이출우검역소(釜山移出牛檢疫所)’가 설치된 곳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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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우암동이 정부가 발표한 부산 시내 주요 피란민수용소 중 한 곳에 포함되면서 우암동에는 수많은 피란민들이 모여들었습니다. 피란민이 모이고 이들을 구호하기 위한 공공기관과 민간단체가 들어서면서 우암동은 전형적인 피란마을이 되었고 여전히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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