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임시수도 관저에서의 순간들

임시수도 대통령 관저(현 임시수도기념관) 기록을 통해 한국 전쟁 중 순간들을 살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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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과 몬그리트 해군 소장임시수도기념관

임시수도대통령관저는 한국전쟁 당시 임시수도대통령관저는 이승만 대통령이 국가의 업무를 처리하고 프란체스카 여사와 함께 일상적 삶을 영위했던 역사적 공간입니다. 임시수도대통령관저의 기록을 통해 전쟁이라는 국가적 위기 상황 속에서  정치, 외교, 군사 등 각 분야와 관련된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과 해미릭 준장 일행임시수도기념관

전쟁 중 대내외 교류와 회담을 위한 장소

이승만 대통령은 임시수도대통령관저에서 한국전쟁에 참전한 유엔군과 미군 그리고 국군 장군들에게 각종의 훈장을 수여하거나 유엔군과 미군 그리고 국군 사령관들을 접견하였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국내외 기자들을 대상으로 기자회견을 가졌습니다. 또한 그는 대한민국의 수반으로서 임시수도대통령관저에서 외국 사절단, 외교관, 정치인 등의 예방을 수시로 받았습니다.

이승만 대통령과 해미릭 준장임시수도기념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덴마크는 인도적 지원으로 병원선 유트란디아호(Jutlandia)를 파견하였습니다. 이 병원선은 1951년 3월 1일부터 진료 업무를 개시하였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2년 3월 28일 임시수도대통령관저에서 유트란디아호에 대한 표창장을 병원선을 대표하는 해군준장 함머리치(Kai Hammerich)에게 전달했으며 병원선의 치과 과장에게는 우리나라 최초 문화훈장인 대한민국장을 수여하였습니다.

이승만 대통령과 몬그리트 해군 소장임시수도기념관

1952년 4월 23일 이승만 대통령이 임시수도대통령관저에서 UN 영국함대 사령관 몬크리프(Scott-Moncrieff) 해군 소장과 주한영국공사 애담스(Alec Adams)를 접견하는 모습입니다. 이날 이 대통령과 몬그리프 사령관은 한·영 양국 해군의 친선 도모 방안을 논의하는 한편으로 한국전쟁 상황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았습니다.

이승만 대통령과 미 육군 참모총장 콜린스임시수도기념관

1952년 7월 15일, 임시수도대통령관저에서는 미육군참모총장 콜린스(Joseph Lawton Collins) 장군, 제 8군사령관 밴플리트(Jamees Alward Van Fleet) 장군, 존 무초(John Joseph Muccio) 주한 미국대사와의 회담이 열렸습니다. 이 자리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전선에서 UN군을 이끈 콜린스 장군에게 대한민국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하였습니다. 이승만 대통령 왼편과 오른편에 각각 서 있는 인물은 콜린스와 밴플리트이고 사진 우측에서 세 번째 인물이 무초이입니다.

이승만대통령 외신 기자 회견임시수도기념관

1951년 7월에 유엔군과 공산군 사이에 휴전회담이 시작되었습니다. 휴전회담은 10개월간 지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는 북진(北進)을 통해 공산주의자들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몰아낼 것을 유엔군에 요구하며 확고하게 휴전을 반대하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2년 1월 9일에 국내 기자단과의 정례 회견에서 이와 같은 한국정부의 입장을 밝혔으며, 같은 달 18일에 대통령 관저에서 외신기자들을 대상으로 회견을 열고 이와 같은 한국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을 대내외에 알렸습니다.

이승만 대통령과 토머스 듀이임시수도기념관

1951년 미국 공화당 소속이자 당시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인 중 한명있었던 토머스 듀이(Thomas Edmund Dewey) 뉴욕주 주지사가 정전회담을 위해 한국을 방문하게 됩니다. 같은 해 7월 8일에 그는 부산 임시수도관저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만났습니다. 

이승만 대통령과 살스버거임시수도기념관

1952년 6월 4일에는 뉴욕타임즈 사장 설즈버거(Arthur Hays Sulzberger)가 이승만 대통령을 예방하였습니다. 이 대통령은 이날 그를 위한 환영오찬회를 개최하였는데, 이 오찬회에는 살스버거 외에 UN 각국 대표와 주한미국대사관 등도 참석하였습니다. 이승만 대통령 바로 왼쪽에 앉은 인물이 살스버기입니다.

이승만 대통령과 중국문화사절단임시수도기념관

1952년 3월 30일에는 임시수도 대통령관저에 중국문화사절단이 이승만 대통령을 예방하였습니다. 이 사절단은 이 대통령의 생일을 축하하며 ‘중국명인묵보록(中國名人墨寶錄)’의 선물을 이 대통령에게 전달하였습니다. 이 선물은 장제스(蔣介石, 1887-1975) 총통을 비롯해 대만의 명사(名士) 33인이 직접 쓴 서예 작품 38점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과 선수단임시수도기념관

한국은 전쟁 중인 상황에서도 올림픽에 참가했습니다. 1952년에 한국은 제 15회 헬싱키올림픽에 6종목에 걸쳐 35명의 선수단을 파견하였습니다. 사진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1952년 6월 10일에 헬싱키올림픽에 출전하는 선수단을 임시수도대통령관저로 초청하여 직접 격려하는 모습이 담겨있습니다.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 생신축하회 행사 장면임시수도기념관

전쟁 중 대통령 내외가 일상적 삶을 기억하는 곳

전쟁이 지속되면서 이승만 대통령이 중요한 정치적 결정을 내려야 하는 상황은 반복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가끔씩 정무에서 벗어나 임시수도대통령관저에서 일상적 삶을 영위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서재에서 독서하거나 서예 연습을 하는가 하면 정원에서 분재를 가꾸거나 감상하였습니다. 특히 그는 자신과 부인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생일 때는 각계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축하 인사를 받으며 즐거운 한때를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 생신축하회 행사 장면임시수도기념관

1951년 6월 15일에 임시수도대통령관저 뒤뜰에서는 프란체스카 여사의 생신을 축하하는 축하행사가 열렸습니다. 이 사진에서 이승만 대통령 내외는 한 어린이의 전통춤 공연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과 군악대임시수도기념관

1952년 3월 26일 이승만대통령의 제78회 생신 축하식의 모습입니다. 행사는 임시수도정부청사에서 개최된 데 이어 임시수도대통령관저에서도 열렸습니다. 관저에서 열린 이 행사에는 각계의 인사들이 많이 참석했으며 군악대의 공연도 펼쳐졌습니다.

이승만 대통령과 김성수 부통령임시수도기념관

전쟁 중 부산정치파동

이승만 대통령은 재임기간 동안 임시수도 부산에서 자신의 대통령 재임을 위해 발췌 개헌안을 통과시켰으며, 이 과정에서 계엄령을 내리고 국회의원들을 불법으로 연행하는 등 ‘부산정치파동’으로 불리는 사건을 일으켜 정치 혼란을 야기하였습니다. 1952년 5월 29일에는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김성수 부통령이 사임하였는데, 그는 대통령관저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방문해 부통령 사임 의사를 밝혔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임시수도기념관

임시수도대통령관저에서 발췌개헌안을 통과시킨 지방대표들의 예방을 받고 있는 이승만 대통령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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